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제45회 ~ 제46회 === * 45회부터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가 등장하지 않고 [[조영무]]만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45회 중간 부분에 해당되는 시점인 1395년에 조영규가 사망하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조영규의 죽음을 잠깐 언급하는 방법으로 극에서 퇴장. 덧붙여 45회 마지막 부분의 시점은 1396년. * 무학대사가 경복궁을 동향으로 지으려다가 정도전에게 태클을 먹고 남향으로 지었다는 얘기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전이 태조에게 '나라의 명운은 도읍의 지기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 것이나, 하륜을 두고서 '술법에 의존해는 간사한 자'라고 디스한 것 역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풍수의 도참이 옛 사람에 의해 말해진 것이라면, 신(臣)이 드리는 말씀(성현의 말) 역시 옛 사람이 말씀하신 바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전하께서는 선비의 말은 듣지 않으시고 '''술수하는 자'''의 말은 믿으시겠습니까?"] * 경복궁의 이름을 짓는 장면도 실제 역사를 각색한 것이다. 경복궁의 경복은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년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정도전이 연회 중 대취한 태조 이성계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조준이 정궁에다가 이름을 짓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장면이 있는데 본디 고려시대의 본궐에는 딱히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일듯.] 그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붙인 것도 모두 정도전이다. [[경복궁 근정전|근정전]], [[경복궁 사정전|사정전]],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등도 정도전이 붙인 이름. * 경복궁과 광화문 거리 공중조감도 CG에서 경복궁의 규모가 매우 작은데 이는 정도전이 만든 경복궁은 약 700칸 규모로 매우 작은 크기였기에 역사에 부합한다. 현재 남은 경복궁 터는 7000칸 규모이며 자금성 면적의 70%에 해당될 만큼 거대한 규모인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부러 부지를 넓힌 것이다. 이방원은 작은 경복궁에 불만을 품고 지금의 창덕궁을 만들어 이사하였다. * 이성계가 완공된 경복궁으로 들어갈 때 궁궐 정문 현판이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이 아니라 '정문'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는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세종 때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태조실록 1395년 9월 29일 기록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기는 하지만 똑같은 태조실록(1395년 10월 7일)을 보면 정도전이 경복궁의 각종 전각들 이름을 지은 뜻을 밝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남쪽의 문을 '''정문'''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기록이 충돌하는 이유는 태조실록은 두 번에 걸쳐 찬집되었는데, 현존하는 태조실록은 세종 30년(1448년) 8월에 찬집된 본이기 때문에 편찬 과정에서 세종 재위기에 이미 쓴 '광화문'이란 이름을 그대로 삽입하였기 때문이다. * [[주원장]]이 표문을 트집잡아서 정도전을 보내라고 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7월 19일(갑술) 1번째기사.] 실제로 주원장은 이 사례뿐만 아니라 명나라 국내에서도 글자를 트집잡아서 신하들을 숙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이 사신으로 온 대가로 선물로 주겠다고 말한것은 각색. 사실 역사상으로 이방원은 극중에서처럼 묶여서 끌려 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선의 세자라면서 엄청난 환대도 받았고 후일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용의 눈물 같은 경우 조사의의 난이 터졌을 무렵 명에 파견된 하륜에게 영락제가 '그대의 임금과 짐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무척 친해졌었고...' 하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주원장이 이방원에게 힘을 실어주어 정도전을 견제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 사신으로 온 이방원 앞에서 주원장이 하는 말에 달린 자막엔 '세자'라 적혀 있긴 하나 실제 발음으로는 '[[외래어 표기법/중국어|타이쯔]]([[병음#s-1|tàizǐ]])[* [[외래어 표기법/중국어|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타이'''쯔'''라고 쓰긴 했지만 실제 한국인이 저 발음을 들어 봤을 때 타이'''즈'''에 좀 더 가깝게 들린다.]', 즉 태자라고 했다. 근래에 한국 사극을 중국어로 옮길 때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게--[* 중국인들한테 '왕'은 군주라기보다 군주의 신하 정도로 생각하여 --명목상 조선 왕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이긴 했지만--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외국의 왕들을 황제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중국 역시 자국의 번왕과 제후국의 국왕의 예를 다르게 생각한 것은마찬가지여서, 조선의 국왕은 자국의 황자들보다 높게 쳐 주었다. 다만 차기 제위를 이을 황태자의 경우는 얄짤없이 조선 국왕보다 위였다.] 국왕을 황제, 세자를 태자라고 자막을 달긴 하지만, 역사 반영을 제대로 한다면 주원장이 조선의 세자 문제를 거론할 때 '태자'라고 하면 안 되고 그대로 '세자', 현대 [[표준중국어]]([[관화]], 만다린)로 한다면[*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이 썼을 중국어는 현재의 표준 중국어와는 달랐겠으나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의 조선어도 현재의 한국어와 다르고-- 사극에 고어를 부활시켜서 사용하진 않으므로 현대 표준어 발음대로 옮기면 될 것이다. 더불어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으로 적힌 중국어 학습서 등을 토대로 볼 때 당시 표준적인 중국어 발음은 현대의 표준중국어보다는 [[산둥성|산동]] 방언이나 [[상해어]]([[오어]]·吳語)의 발음 체계에 좀 더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중국어를 기준으로 봤을 때 산동 방언과 상해어가 현대 표준어보다 보수적인 발음 체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 그리고 이색이 주원장을 만났을 때 이색이 구사한 중국어(당대의 북경어)를 주원장이 알아 듣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다가 여러 정황을 보면 그가 당대의 남방 방언을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당대의 해당 지역 발음을 구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편찬된 당대 중국어 발음을 훈민정음으로 옮긴 기록들은 현대에 명·[[청나라|청]] 시대 중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스쯔(shìzǐ)라고 말해야 한다. 조선에서 쓰는 칭호·관직명은 명나라에서도 변함 없이 그대로 부르는 것이었고(애초에 명나라한테 승인을 받은 관직명들이다) 명나라 국내에도 세자라는 칭호가 있었다. 세습이 허용된 제후들의 후계자는 황태자와 구분해서 세자라고 했기 때문이고 제후국인 조선도 그것을 따른 것이다. 아무튼 엄밀히 반영할 셈이었다면 주원장이 '타이쯔' 대신 '스쯔'라고 해야 한다. * 45회부터 권근이 조선 조정에 출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록에서 권근이 조정에서 업무를 수행한 기록이 1394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 45회에서 이성계가 --조선나이트--연회를 베풀고 정도전에게 '유종공종(儒宗功宗)'의 칭호를 내린 것,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말에서 떨어졌을 때를 잊지 말라고 한 것,[* 이성계가 즉위하기 직전에 낙마 사건으로 이성계 일파들이 정몽주에게 역습을 당해서 조선 건국이 무산될 뻔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4년 뒤 시점에서도 충분히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정도전이 이성계 앞에서 춤을 춘 것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곱사춤을 춘것은 용의 눈물의 오마주이다.] --상의 탈의를 안했으니 역사 왜곡이다.-- > 밤에 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 등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혔다. 주연(酒宴)이 한창 벌어질 무렵에 임금이 정도전에게 하는 말이,“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경 등의 힘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대에까지 이르기를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하니, 도전이 대답하였다.“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떻게 해야 나라가 다스려지오?’ 하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莒) 땅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마옵시고, 원컨대, 중부(仲父)께서는 함거(檻車)에 있을 때를 잊지 마소서.’ 하였으니, 신이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말 위에서 떨어지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역시 항쇄(項鎖)했을 때를 잊지 않으면, 자손 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서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하고, 도전에게 눈을 껌벅이면서 하는 말이,“이 곡은 경이 찬진(撰進)한 바이니 경이 일어나서 춤을 추라.”하니, 도전이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상의(上衣)를 벗고 춤을 추라 하고, 드디어 귀갑구(龜甲裘)를 하사하고는 밤새도록 심히 즐기다가 파하였다.ㅡ《조선왕조실록》태조 8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10월 30일(경신) 1번째기사. * 이숙번이 정도전의 진법훈련에 반대하다가 매를 맞는 것은 작가의 창작이다. 애시당초 이 장면 자체가, 드라마 초기의 정도전과 이인임의 대립 장면에서 가져온 것. 이숙번은 [[1차 왕자의 난]] 이전까지는 과거시험에 합격한지 얼마 안된 평범한 하급관리에 불과해서 실록을 포함한 역사기록이 별로 없다. 여담으로 이숙번은 조선 최초의 과거합격자중 한 사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